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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의 다락/Travler's Notebook

겨울의 필사

작은 게 2019. 9. 16. 14:52

트래블러스 노트 블루 오리지널에 계속 해나가고 있는 필사.

사용하는 내지는 유선 리필지. 필기구는 그때 그때 쓰고 싶은 만년필.

주로 책을 읽고 감명 깊은 구절을 발췌해서 필사하는 식으로 썼다. 정식 필사라기보다는 약식(?)에 가깝지만.

 

겨울에 한창 몰입해서 읽던 책인 최진영 작가의 장편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2017, 민음사)'와 안톤 체홉의 단편 소설집(2002, 민음사).

 

*참고로 이때 썼던 잉크는 세일러의 '공방잉크 123번' . 차분하면서 오묘한 색이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말하자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을 테마로 하고 있는데, 단순히 먼 곳이나 먼 미래의 이야기, 상상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를 한꺼풀 더 에둘러서 비춰주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이다.

아주 폭력적이고 처절한 이야기를 시적으로, 서정적으로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절망적 시대를 배경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재난 장르처럼 생존이 성공과 종착점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물론 생존은 가치 있게 여겨지지만,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그렇게 되기 전 지금, 아니 이미 거의 아포칼립스나 다름없이 망한 것 같은 지금에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이다. 그것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하고 있다.

읽으면서 눈물도 났고, 마음을 울리다 못해 파고드는 문장들도 꽤 있었던 소설.

 

또 겨울은 체홉에 푹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지.

짜임새 있고 위트도 있고, 뼈를 쪼개고 나오는 희미한 빛 같은 날카로움도 있다.

가끔씩 등장하는 재기발랄함 가운데서 문득 소름끼치는 삶의 진실이 암시될 때는 감탄하게 되곤 했다.

대체로 즐겁게(?) 읽고 필사했던 소설집.

 

 

내게는 너무 길고 황량한 겨울을 조금이라도 더 평온한 공기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이 필사인 것 같다.

조금 따뜻한 공간, 푹 빠져 읽을 책 한 권,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만년필과 노트, 그리고 한 잔의 따뜻한 커피나 차만 있으면 겨울 나기도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계절에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써나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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